||0||0<주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또는 루카 10,38-42>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성경에 따르면,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자주 초대할 정도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을 통하여 중요한 계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 복음의 표징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가장 중요한 표징인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머지않아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요한 11,53 참조). 그들은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따라갈 것을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었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표징을 통하여 그 믿음을 확인받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계기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르타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마르타는 그분을 뵙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으며 그분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 속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요?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할까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을 때에,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음을 느끼는지요? 우리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요한 1서는 제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거나 깨달은 것이라고 일러 줍니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9-27<또는 루카 10,38-42>
그때에 19 많은 유다인이 마르타와 마리아를 그 오빠 일 때문에 위로하러 와 있었다. 20 마르타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그분을 맞으러 나가고, 마리아는 그냥 집에 앉아 있었다.
21 마르타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22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것을 저는 지금도 알고 있습니다.”
23 예수님께서 마르타에게, “네 오빠는 다시 살아날 것이다.” 하시니, 24 마르타가 “마지막 날 부활 때에 오빠도 다시 살아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2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고, 26 또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
27 마르타가 대답하였다. “예, 주님!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성경에 따르면, 라자로와 그의 동생 마르타와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집에 자주 초대할 정도로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오늘 복음을 통하여 중요한 계시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라자로를 다시 살리신 표징 앞에서, 사람들은 상반된 반응을 보입니다. 요한 복음의 표징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부활을 예고하신 가장 중요한 표징인 이 사건은, 역설적으로 머지않아 최고 의회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정하는 동기가 될 것입니다(요한 11,53 참조). 그들은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따라갈 것을 두려워하여 이와 같이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마르타는 예수님이 부활이요 생명이심을 믿었고, 라자로가 다시 살아나는 표징을 통하여 그 믿음을 확인받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사건이, 어떤 이들에게는 예수님을 거부하는 계기가 되고 어떤 이들에게는 그분을 하느님의 아드님으로 고백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 독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르타는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당신 외아드님을 보내시는 것으로 나타났는데, 마르타는 그분을 뵙고 그분이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았으며 그분을 맞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 속하는 이들이 더 많을까요? 우리는 과연 어느 쪽에 속할까요? 복음서에 기록된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읽을 때에,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알아보고,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깨닫고,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나타났음을 느끼는지요? 우리가 스스로 점검할 수 있는 기준을 요한 1서는 제시하는데, 그것은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면서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고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거나 깨달은 것이라고 일러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