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 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복음: 요한 8,1-11
< 중재자를 통한 구원 >
「레미제라블」이라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과거를 숨기고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 지방 도시의 시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한 노인이 수배 인물 장발장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그는 벽장 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한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재판정에서 판사의 언도가 내려지려는 순간 진짜 장발장은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내가 장발장이요!”
결국 장발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뻔한 노인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모두 포기하였습니다.
장발장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처음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주었던 주교님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훔친 물건들을 당신이 거저 준 것이라고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장발장은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다시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발장에게 주교님이 없었다면 그는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없는 범죄자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서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파견자를 알아보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오늘 길고도 긴 수산나 이야기가 독서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 또한 오직 성령을 지니고 파견된 분을 통해서만이 구원이 온다는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두 노인은 수산나를 탐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너무도 강력해서 수산나는 결국 사형언도를 받게 됩니다. 두 노인은 바로 백성의 재판관이었습니다. 자신의 올바름으로 타인을 심판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상징합니다. 그들을 통해서는 죽음밖에 올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수산나는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법에 얽매어있는 우리들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율법으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은 어차피 어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이 죄인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자비만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는데, 인간은 그 법을 잘 지킨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자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습니다.” 영은 하느님의 숨이고 기름부음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라 하고 그리스도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파견된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음을 통해 파견된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수산나 이야기를 통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당신의 선택으로 파견하신 성령으로 가득 찬 어떤 중재자에 의해 우리 구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며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입구에는 ‘키몬과 페로’란 루벤스의 작품이 걸려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거의 벗다시피 한 노인에게 웃통을 벗어 젖을 물리는 이상야릇한 작품입니다. 자세히 보면 키몬은 체인에 묶여 감옥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키몬은 푸예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지만 국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 당일까지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형 전에 갓 몸을 푼 키몬의 딸 페로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뵈러 감옥에 들어와 지금까지 물도 한 모금 먹지 못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는 그림인 것입니다.
누구도 음식을 가져들어가지 못하는 그곳에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서 부끄러움 없이 웃통을 벗어 아버지에게 젖을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은 키몬의 딸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은 생명수를 잔뜩 지니시고 그 생명의 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신랑이요 중재자 그리스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나에게서 드러나고 나는 사형당한 죄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수산나의 긴 독서의 의미입니다.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여 이 세상 다른 어떤 것도 가치 있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수산나가 사형을 면하고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말씀
복음: 요한 8,1-11
< 중재자를 통한 구원 >
「레미제라블」이라는 빅토르 위고의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전과자였던 장발장은 과거를 숨기고 개과천선하여 새로운 이름으로 어느 지방 도시의 시장이 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사과를 훔치다 붙잡힌 한 노인이 수배 인물 장발장으로 판명이 되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장발장은 고민이 되었습니다.
“조용히 있어야 하는가? 정체를 밝혀야 하는가?”
그는 벽장 속 깊숙한 곳에서 자신이 진짜 장발장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건들을 하나하나 꺼냈습니다. 그리고는 심한 갈등과 번민으로 밤을 지새웠습니다. 다음 날, 재판정에서 판사의 언도가 내려지려는 순간 진짜 장발장은 일어서며 말했습니다.
“내가 장발장이요!”
결국 장발장은 자신을 대신하여 처벌을 받을 뻔한 노인을 위해 명예와 권세를 모두 포기하였습니다.
장발장이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용기는 처음 자신에게 그런 사랑을 보여주었던 주교님 때문이었습니다. 자신이 훔친 물건들을 당신이 거저 준 것이라고 증언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장발장은 세상에 사랑이 있음을 다시 믿기 시작하였습니다. 장발장에게 주교님이 없었다면 그는 누구를 위해서도 희생할 수 없는 범죄자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누구든 받아야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받아서 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는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모든 죄를 짊어지고 그 죗값을 치러야만 합니다. 그러나 내가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줄 수 있겠습니까? 나에게 당신 생명을 내어주시는 주님의 파견자를 알아보는 것이 신앙의 길입니다.
오늘 길고도 긴 수산나 이야기가 독서로 나옵니다. 이 이야기 또한 오직 성령을 지니고 파견된 분을 통해서만이 구원이 온다는 성경 전체의 줄거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두 노인은 수산나를 탐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증언은 너무도 강력해서 수산나는 결국 사형언도를 받게 됩니다. 두 노인은 바로 백성의 재판관이었습니다. 자신의 올바름으로 타인을 심판하는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를 상징합니다. 그들을 통해서는 죽음밖에 올 수 없음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수산나는 바빌론으로 유배되어 간 이스라엘의 처지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또 법에 얽매어있는 우리들의 처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그들에겐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율법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 율법으로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 율법은 어차피 어떤 누구도 지킬 수 없는 법이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이 죄인음을 드러내는 목적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즉, 하느님은 오직 당신의 자비만을 드러내시기 위해, 그래서 인간은 모두가 죄인임을 드러내시기 위해 율법을 주셨는데, 인간은 그 법을 잘 지킨다고 착각하고 그래서 자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통해서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오늘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습니다.” 영은 하느님의 숨이고 기름부음입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를 메시아라 하고 그리스도라 합니다. 주님으로부터 기름부음 받아 파견된 그리스도를 의미하기도 하고, 또 그리스도의 기름부음 받음을 통해 파견된 교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수산나 이야기를 통해 율법에 의해서가 아니고 당신의 선택으로 파견하신 성령으로 가득 찬 어떤 중재자에 의해 우리 구원이 이루어질 것임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며 남을 판단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히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입구에는 ‘키몬과 페로’란 루벤스의 작품이 걸려있습니다. 젊은 여인이 거의 벗다시피 한 노인에게 웃통을 벗어 젖을 물리는 이상야릇한 작품입니다. 자세히 보면 키몬은 체인에 묶여 감옥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키몬은 푸예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사람이지만 국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 당일까지 음식물을 먹지 못하게 했습니다. 사형 전에 갓 몸을 푼 키몬의 딸 페로가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뵈러 감옥에 들어와 지금까지 물도 한 모금 먹지 못한 아버지에게 자신의 젖을 먹이는 그림인 것입니다.
누구도 음식을 가져들어가지 못하는 그곳에 음식을 가지고 들어가서 부끄러움 없이 웃통을 벗어 아버지에게 젖을 물려줄 수 있는 사람은 키몬의 딸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구원은 생명수를 잔뜩 지니시고 그 생명의 물을 주실 수 있는 유일한 신랑이요 중재자 그리스도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오직 그리스도의 자비만이 나에게서 드러나고 나는 사형당한 죄수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 오늘 수산나의 긴 독서의 의미입니다. 오직 그분에 의해서만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만으로 감사하여 이 세상 다른 어떤 것도 가치 있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수산나가 사형을 면하고 그런 마음이 아니었겠습니까?
-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말씀
어제 본당 신부님께서 미사 집전 전에 '동병상련' 의 의미를 재해석해 들려주신 말씀이 마음 깊숙하게 남아있습니다.
위의 글귀와 마르코 신부님의 '동병상련' 을 접목해 실천하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