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성지 순례 (4-2): 성 종태(토마스 모어)

by 尹若瑟 요셉 posted Oct 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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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성지 순례 (4-2)



                               글쓴이 : 성 종태(토마스 모어)

2. 소토메(外海)
  첫 밤을 보낸 히라도의 ⌜란푸호텔⌟에서 소토메까지는 약 2시간 20분 정도 버스로 달렸다.
성지 순례 중 첫 미사를 봉헌할 ⌜오우라 천주당⌟에서는 예정보다 조금 늦게 도착하였다.
이 성당은 1864년 어느 프랑스인 신부님에 의해 건축된 고딕양식의 목조 건물로
정식 명칭은 ⌜일본 26성인의 순교자 기념 성당⌟이다.
서양식 건물 중 유일하게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성당 내부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100여년 전에 프랑스에서 들여 온 것이며
1597년에 26명의 교우가 순교하신 니시자카 언덕(현재는 순교자 기념 공원)을 바라보고 있다.
선교사 6명과 일본인 신자 20명, 도합 26명의 순교자들의 모습을 청동색 벽면에 동(銅)으로 새겨
(부조모양) 형상화 해 놓았다.
일본인 중에는 세 명의 어린이가 포함되어 었었는데
그중에서도 12살의 이바라키(루드비코)는 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차마 십자가에 매달 수가 없어서 풀어주었으나,
그의 아버지 이바라키(바오로)가 가시는 길을 자신도 함께 가겠다며
스스로 십자가 위에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순교자 기념 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하는 것만도 큰 영광인데
이 뜻 깊은 미사에 독서 봉독를 하게 되어 감사 할 따름이었다.
이곳의 신자 수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성당 사용료를 정해놓고 받는 것도 특색이었다.
이어서 니시자카 언덕의 순교자 기념 공원 참배를 마치고 ⌜26인 순교자 상⌟ 앞에서 단체로 기념촬영을 하였다.
소토메와 우라카미에는 숨은 신자들, 소위 ‘잠복 기리스탄’이 많다고 하였다.
가톨릭 금교령이 내린 후에도 가톨릭 신앙은 이어졌고
우라카미의 ⌜성녀 글라라 성당⌟을 관리하던 마고에몬은 잠복 신앙 조직을 만들어
금교령이 해제 되기까지 250년간 가톨릭 신앙을 유지 할 수 있게 하였다.

3. 나가사끼
  소토메에서 나가사키까지는 버스로 15분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다.
일행은 먼저⌜원폭 자료관⌟ ⌜평화공원⌟ 원폭 한국인(조선인) 희생비를 순례하였다.
원폭 자료관⌟에서 직접 목격한 원폭 피해의 참상은 이루다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고,
북쪽에 핵 무기를 두고 있는 우리로서는 과거 일본땅에서 겪은 참상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인 희생자 비⌟의 초라한 모습과 한쪽 구석에 버려진 듯 서 있는 광경을 보니
일본 내에서 우리의 국력이 보잘 것 없음을 실감하였다.

  오후에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며 뛰어난 문필가인 나가이 다카시 박사(1908~1951)의 기념관인  
여기당(如己堂)⌟을 관람하였다.
부인 미도리(마리안나)여사는 원폭에 희생되었고,
다행히 후쿠오카 친척집에 가 있어서 화를 면하게 된 두 어린 자녀와 함께 약 5평 정도의 좁은 공간의
⌜여기당⌟에서 생활하였다.
현재 이곳에는 그의 유품과 저서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는 부인의 권유로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폴란드인) 신부님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세례명은 바오로이다.
그는 방사능 피폭으로 자신이 백혈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의사로서 원폭피해로 고통 받는 환자들을 열심히 돌보았으며
엄마 없는 두 아이를 데리고 살면서 그곳에서 불후의 저서들을 집필하였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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